
"사람은 다른데, 이상하게 관계의 끝은 늘 비슷해요."
연애를 할 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다정했지만 점점 나를 무시하는 사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
관계가 끝나면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사람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면 어느 순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상대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왜 나는 관계에서 자꾸 비슷한 상처를 경험하는 걸까요?
우리는 사람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관계'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좋은 관계만을 선택할 것 같지만,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좋은 것보다 익숙한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사랑을 얻기 위해 늘 눈치를 봐야 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노력해야 유지되는 관계가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부모의 관심을 얻기 어려웠던 사람은 자신에게 충분히 관심을 주는 사람보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더 강하게 끌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관계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관계에서는 '마음속의 관계'를 중요하게 봅니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어린 시절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 경험이 마음속에 남는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Object)'은 단순히 어떤 물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정서적으로 중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대상은 주로 부모나 주양육자입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이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이미지도 만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
"상대방은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는 사람."
이런 관계의 경험이 반복되면 하나의 관계 패턴이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에게도 오래된 관계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지만,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의 오래된 관계방식이 활성화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조금 멀어진 것뿐인데
"역시 나를 떠나려고 해."
라고 느끼고,
상대방이 나에게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나를 무시하는 거야."
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면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현재의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어떤 순간에는 과거의 관계에서 배운 마음으로 현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강박 — 이번에는 결말이 달라지기를 바라며
정신분석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현상을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왜 사람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관계를 다시 반복할까요?
단순히 상처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과거와 비슷한 관계를 다시 만들면서 이번에는 다른 결말을 얻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번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싶습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면,
이번에는 끝까지 사랑받고 싶습니다.
떠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다면,
이번 사람만큼은 나를 떠나지 않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힘든데도 쉽게 놓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번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이런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나를 힘들게 할수록 오히려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조금 더 잘해주고,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기다립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런 기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결국 사랑받을 수 있다면,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 같아."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의 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게 됩니다.
과거에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 현재의 상대에게서 받아내려고 애쓰게 될 수 있습니다.
익숙함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만났는데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락이 일정하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나를 존중하는 사람인데도
"설레지 않아."
라고 느낍니다.
반대로 연락이 왔다가 사라지고,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사람에게는 강렬하게 끌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기다림, 안도와 실망이 반복되는 관계가 익숙했다면 안정감보다 긴장감이 사랑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강한 끌림이 모두 이런 이유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복해서 비슷한 관계를 선택하고 있다면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계의 패턴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문제를 어린 시절 탓으로 돌리거나 상대방의 행동을 자신의 심리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무례하고,
통제적이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관계를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내가 애착이 불안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야."
라고 합리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부당한 관계를 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사람'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살펴보세요.
비슷한 관계가 반복된다면 상대방들의 공통점만 찾기보다 관계 속에서 내가 반복해서 경험하는 감정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나는 관계에서 늘 무엇을 느끼나요?
버림받을까 두려운가요?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나요?
상대방을 돌보느라 내 욕구를 포기하나요?
가까워지면 갑자기 답답해지나요?
거절당할 것 같으면 먼저 관계를 끊어버리나요?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볼 수 있습니다.
"이 감정은 나에게 언제부터 익숙했을까?"
그 질문에서 자신의 관계 패턴을 이해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복을 알아차리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관계에 자동적으로 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계속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상대방이 멀어지면 더 붙잡았다면,
이번에는 잠시 멈춰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계속 맞춰주었다면,
이번에는
"나는 이 관계에서 무엇을 받고 있는가?"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정적인 관계가 심심하게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그 편안함을 조금 더 견뎌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동적인 반복 사이에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상담에서는 '왜 그런 사람을 만났어요?'라고 묻기보다
반복되는 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왜 그런 사람만 만나요?"
라고 묻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담에서는 함께 살펴봅니다.
그 사람에게 처음 무엇이 끌렸는지,
관계에서 어떤 순간 가장 불안해지는지,
상대방이 멀어질 때 자신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그때 느끼는 감정이 과거의 어떤 관계와 닮아 있는지.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야."
라는 자기비난 대신,
"나는 익숙한 관계를 반복하고 있었구나."
라는 이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해는 변화의 시작이 됩니다.
마음 한마디
우리가 같은 사람에게 반복해서 상처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
실제로는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관계의 자리에 반복해서 서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붙잡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인정받으려 애쓰는 사람,
늘 이해해주는 사람,
혹은 상처받기 전에 먼저 떠나는 사람.
그 자리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에 만들어진 자리라고 해서 평생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관계를 반복하는지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다음 관계에서는 조금 다른 자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안전하게 대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오래된 관계의 반복에서 벗어나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위한 한 줄
"우리는 익숙한 관계를 반복할 수 있지만, 익숙한 관계가 반드시 나에게 좋은 관계인 것은 아닙니다."
※ 본 글은 정신분석의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과 대상관계이론, 애착이론의 관점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심리교육을 위해 쉽게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반복되는 관계의 원인은 개인마다 다르며, 모든 관계 문제를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무의식적 반복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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