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상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아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요?"
넘어졌는데도 울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속상한 일을 당했는데도
"괜찮아요."
라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혼이 난 뒤에도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아이를 보며 말하기도 합니다.
"참 의젓하네."
"마음이 강한 아이인가 봐."
물론 정말 감정을 잘 조절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왜 자신의 감정을 숨기게 될까요?
아이는 처음부터 감정을 잘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감정을 혼자 이해하고 조절하기 어렵습니다.
속상하면 울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무서우면 부모에게 달려갑니다.
이때 부모가
"많이 속상했구나."
"무서웠구나."
"화가 많이 났네."
라고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아, 내가 지금 속상한 거구나."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함께 담아주고 이름 붙여주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점차 자신의 마음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감정을 표현할 때 관계가 불편해진다면
아이가 울 때마다
"그만 좀 울어."
"그게 울 일이야?"
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화를 냈을 때
"착한 아이가 왜 그래?"
라고 혼나고,
서운하다고 말했을 때
"엄마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라는 반응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감정 자체보다 감정을 표현했을 때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더 신경 쓰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씩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울면 엄마가 힘들어하는구나."
"화내면 사랑받기 어려운가 봐."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게 낫겠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아이 나름의 적응일 수 있습니다.
어른의 눈에는 아이가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부모는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부모와의 관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참으면 괜찮아."
"내가 착하게 있으면 엄마가 힘들지 않을 거야."
감정을 숨기는 행동은 때로 아이가 관계 속에서 발견한 가장 안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회피애착의 아이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애착 연구에서 회피적인 애착전략을 사용하는 아이는 겉으로는 부모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비교적 담담해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왔을 때 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거나,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이 적다고 해서 아이에게 애착욕구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도움을 요청해도 충분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면 아이는
"필요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다."
는 방향으로 적응할 수 있습니다.
"착한 아이"가 감정을 숨기기도 합니다.
말을 잘 듣고,
부모를 힘들게 하지 않으며,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
부모 입장에서는 키우기 편한 아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부모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는 아이라면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 힘들어 보여서 말 안 했어요."
"아빠 화낼까 봐 괜찮다고 했어요."
이런 아이는 자신의 감정보다 부모의 감정을 먼저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배려할 수는 있지만,
부모의 정서적 안정을 책임지는 역할까지 맡아서는 안 됩니다.
위니컷의 '거짓자기'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위니컷은 아이의 자발적인 욕구와 표현이 환경에 의해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환경의 요구에 맞추는 방식이 지나치게 발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거짓자기(False Self) 개념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점점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지?"
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엄마가 좋아할까?"
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모범적이고 착한 아이인데,
정작 자신의 마음을 물으면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는 아이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계속 참는다고 해서
슬픔,
분노,
불안,
서운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밖으로 표현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에게는 그것이
갑작스러운 짜증,
두통이나 복통 같은 신체적 불편감,
잠들기 어려움,
손톱 물어뜯기,
과도한 완벽주의,
사소한 상황에서의 폭발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행동만으로 감정억압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전반적인 생활과 관계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부모가 "말해봐"라고 한다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묻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런데 아이는 계속
"몰라."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합니다.
이때
"엄마한테 말해봐."
"왜 말을 안 해?"
라고 계속 묻게 되면 아이에게 감정을 이야기하는 일이 또 하나의 요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을 시간도 필요합니다.
먼저 '말해도 괜찮은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을 보여줘도 관계가 안전하다는 경험입니다.
아이가 화를 냈을 때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라고 바로 감정을 막기보다,
"많이 화가 났구나. 화난 건 괜찮아. 하지만 때리는 건 안 돼."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정과 행동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허용하지만 행동에는 한계를 세우는 것.
이 경험은 아이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의 감정을 부모가 대신 결정하지 않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안 아파, 괜찮아."
라고 바로 말하기보다
"많이 놀랐어?"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친구와 싸웠을 때도
"그 친구 때문에 속상했구나."
라고 단정하기보다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알려주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모습도 아이에게 중요한 경험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보다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부모가 화가 날 때마다 폭발하거나,
슬픈 감정을 무조건 숨기거나,
힘들면서도 항상 괜찮은 척한다면
아이 역시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우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엄마가 지금 조금 속상하네.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할게."
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숨겨야 하는 것도, 그대로 폭발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자주 해주세요.
감정을 숨기는 아이에게는 거창한 질문보다 일상적인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속상해도 괜찮아."
"엄마가 실망할까 봐 네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돼."
"지금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나중에 말해도 돼."
"화난 마음은 괜찮아.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네 마음이 엄마 생각과 달라도 괜찮아."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조금씩 배웁니다.
"내 마음을 보여줘도 관계가 깨지지 않는구나."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더 힘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조용했던 아이가 갑자기
"싫어!"
라고 말하고,
화를 내고,
서운함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부모는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이러지?"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이제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다고 느끼기 시작한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반항이나 공격적인 행동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감정표현이 늘어난 것과 행동문제가 악화된 것을 구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관계를 믿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일입니다.
화난 마음을 보여주고도
부모가 떠나지 않는지,
서운하다고 말하고도
사랑받을 수 있는지,
울어도
귀찮은 아이가 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면
그 마음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모가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그 마음을 가진 너와도 나는 함께 있을 수 있어."
마음 한마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
"원래 무던한 아이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질의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한 번쯤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감정이 없는 걸까, 아니면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걸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슬퍼도,
화가 나도,
질투해도,
서운해도
그 마음 때문에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는다는 경험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모든 감정을 해결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감정과 함께 머물러줄 수는 있습니다.
그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부모를 위한 한 줄
"아이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그 관계가 안전하다고 믿기 시작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애착이론, 정서조절 발달, Winnicott의 거짓자기(False Self) 및 정신역동·대상관계적 관점을 바탕으로 부모교육을 위해 쉽게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감정표현이 적다는 사실만으로 회피애착이나 심리적 어려움을 판단할 수 없으며, 아동의 기질과 발달단계, 가족관계 및 생활환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